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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나가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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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나가요시는 1558년에 태어나 1584년에 사망한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다케다 가문 공격에서 큰 공을 세워 시나노 가와나카지마 4개 군을 영지로 받았다. 혼노지의 변 이후 미노 가네야마 산성으로 돌아갔으며,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과의 전투 중 전사했다. 그는 '귀무장'으로 불릴 만큼 용맹했으며, 다도와 명물 수집에도 조예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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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나가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세이사 소장
이름모리 나가요시
로마자 표기Mori Nagayoshi
가명가쓰조, 가쓰미 (통칭), 나가히토
별명오니무사시, 야샤무사시 (혼명)
계명철개수공대선정문, 영광원전혜덕장영일승대거사
묘소기후현가니시가세이사, 오카야마현쓰야마시본원사
생애
시대전국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에이로쿠 원년 (1558년)
사망덴쇼 12년 4월 9일 (1584년 5월 18일)
소속오다 노부나가하시바 히데요시
주군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씨족모리 씨
아버지모리 요시나리
어머니에이 (묘향니, 하야시 미치야스의 딸)
배우자정실: 이케다 센, 측실: 가기야 마사쓰구의 딸
자녀겐바 (적남), 오코우 (딸)
형제자매가네타카, 나가요시, 나리토시 (란마루), 나가타카, 나가우지, 다다마사, 우메 (기노시타 가쓰토시 정실), 벽송원 (세키 교세이 정실)
관위종오위하
관직히다노카미
군사 경력
소속 부대가네야마 성
전투나가시마 포위전 (1574년), 시기산 포위전 (1577년), 다카토 성 포위전 (1582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1584년)

2. 생애

에이로쿠 원년(1558년) 모리 요시나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겐키 원년(1570년) 아버지와 형 요시타카가 전사하면서 가독을 이어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덴쇼 2년(1574년) 이세 나가시마 잇코잇키 공격에 참가해 무공을 세우는 등 노부나가 휘하에서 활약했다. 덴쇼 10년(1582년) 고슈 정벌에서 공을 세워 시나노의 가와나카지마 4개 군 20만 석 영지를 받아 가이즈 성에 입성했다.

같은 해 음력 6월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새로 얻은 시나노 영지의 통치가 어려워져 옛 영지인 미노의 가네야마 산성으로 돌아왔다. 미노 귀환 후 인접한 나에키 성주 도야마 도모타다 등 주변 세력과 대립했으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접근하여 후원을 얻고 미노 동부 지배를 확고히 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히데요시 측으로 참전하였으나, 장인 이케다 쓰네오키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미카와를 기습하려다 이를 간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의 역습을 받아 미간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향년 27세였다. 그의 뒤는 동생 다다마사가 이었다.

2. 1. 가독 상속 및 오다 가문 섬김

에이로쿠 원년(1558년) 모리 요시나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겐키 원년(1570년) 아버지 요시나리와 형 요시타카가 전사하면서, 불과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이어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이때 노부나가로부터 이름 한 글자를 받아 '''쇼조 나가요시'''(昌蔵 長可|쇼조 나가요시일본어)를 자칭했다. 겐키 3년(1572년) 12월에는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 하나와 나오마사 등과 함께 발급 문서에 연서했는데,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이미 다른 중신들과 동등하게 활동했음을 보여준다.

겐키 4년(1573년) 3월, 제2차 나가시마 잇코잇키 공격에 오다 노부타다의 부대에 속해 첫 출진했다. 이 전투에서 이나바 요시미치, 세키 나리마사 등과 함께 잇키 세력에 돌격했으며, 모리 가문에서는 가카미 모토마사 등이 공을 세워 노부나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5]. 같은 해 마키시마 성 전투에서는 노련한 가신들을 제치고 선두에서 우지 강을 건넜으나, 성 안이 이미 비어 있어 큰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이듬해인 덴쇼 2년(1574년)에는 제3차 나가시마 잇코잇키 공격에서 나가시마 성 공격 부대에 참가했다. 이때 세키 나리마사와 함께 쳐들어온 잇키 군을 물리쳤고, 노부타다 군과 잇키 세력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을 때는 배로 강을 건너 잇키 세력 27명을 죽이는 등 뛰어난 무용을 보였다[5]. 이후 노부타다 휘하의 주요 무장으로서 나가시노 전투, 미노 이와무라 성 공격, 엣추 국 침공, 셋쓰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 미키 합전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웠다.

덴쇼 5년(1577년) 무렵부터는 내정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거성인 카네야마 성(현 기후현 카니시 카네야마) 주변 지역 발전을 위해 인근을 흐르는 기소가와를 활용한 상업을 중시하여 하항(카네야마 항) 정비, 카네야마 성 아래 마을의 구획 정리, 여섯 날마다 시장이 서는 육재시(六斎市) 개최 등을 실시했다. 또한 내륙에서 구하기 어려운 해산물과 소금의 수요를 파악하고 전매제를 실시하여, 지역 상인에게 전매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 세금을 확보했다. 이 전매제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훗날 모리 가문이 미노를 떠난 후에도 상인들이 나가요시가 발급한 서장을 근거로 오와리 번의 미노 대관에게 제도 존속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오와리 번은 원래 전매 대상이 아니었던 생선과 소금의 전매를 특례로 인정했고, 이 제도는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졌다[6].

2. 2.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시절

에이로쿠 원년(1558년), 모리 요시나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겐키 원년(1570년) 아버지 요시나리와 형 요시타카(可隆)가 전사하자,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이어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노부나가로부터 이름 한 글자(나가, 長)를 받아 勝蔵 長可|쇼조 나가요시일본어라 칭했다. 겐키 3년(1572년)에는 15세의 나이로 이미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 등 오다 가문의 중신들과 함께 문서 발급에 연서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다.

겐키 4년(1573년) 3월, 오다 노부타다의 부대에 속해 제2차 나가시마 잇코잇키 공격에 참가하며 첫 출진을 경험했다. 이 전투에서 가카미 모토마사 등 모리 가문의 가신들이 공을 세워 노부나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5] 같은 해 마키시마 성 전투에서는 노련한 가신들을 제치고 선두에 서서 우지 강을 건넜지만, 성이 이미 비어 있어 무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이듬해인 덴쇼 2년(1574년) 제3차 나가시마 잇코잇키 공격에서는 나가시마 성 공격 부대에 참가하여 세키 나리마사와 함께 잇키 군을 격퇴했으며, 노부타다 군과 잇키 세력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을 때는 배로 강을 건너 잇키 세력 27명을 베는 등 뛰어난 용맹을 보였다.[5] 이후 노부타다 휘하의 주요 무장으로서 나가시노 전투, 미노 이와무라 성 공격, 엣추 국 침공, 셋쓰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 미키 합전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웠다.

덴쇼 5년(1577년) 무렵부터는 전투뿐만 아니라 내정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거성인 카네야마 성(현 기후현 카니시 카네야마) 주변 지역 발전을 위해 인근을 흐르는 기소가와를 활용한 상업을 중시하여 하항(카네야마 항)을 정비하고, 성 아랫마을의 구획을 정리했으며, 정기 시장인 육재시(六斎市)를 열었다. 또한 내륙에서 구하기 어려운 해산물과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하여 지역 상인에게 독점 판매권을 부여하는 대신 세수를 확보했다. 이 제도는 효과가 커서, 훗날 모리 가문이 미노를 떠난 뒤에도 상인들이 나가요시가 발급한 서장을 근거로 제도 존속을 요구하여 오와리 번에서 특례로 인정받았고,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졌다.[6]

덴쇼 10년(1582년) 다케다씨 정벌전인 고슈 정벌에서는 단 츄세이와 함께 선봉 부대의 장수로 발탁되었다. 2월 6일 기소 계곡을 통해 시나노 국의 다케다 영지로 침공하여, 14일에는 마츠오 성의 오가사와라 노부미네를 항복시키고 이이다 성의 호시나 마사나오를 패주시켰다. 15일에는 도망치는 마사나오의 부대를 추격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7] 니시나 모리노부가 지키는 다카토 성 공략에서는 노부타다가 이끄는 본대를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모리 부대는 성의 삼의문(三の丸) 지붕으로 올라가 판자를 뜯어내고 성 안으로 조총 사격을 가했으며, 혼마루(本丸) 방면의 수비 병력까지 사격하여 함락에 크게 기여했다. 혼마루 제압 시에는 직접 창을 들고 싸우다 손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병을 쓰러뜨리는 용맹을 보였다. 그러나 본대 도착 전에 단 츄세이와 함께 두 차례 군령을 위반하여 노부나가로부터 서신으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고슈 정벌 이후에는 고즈케 국으로 진격하여 고모로 성을 접수하고 오바타 씨 등 지역 호족들의 인질을 징수했다.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다케다 가문 멸망 후 노부나가로부터 시나노의 가와나카지마 4개 군(다카이, 미즈나이, 사라시나, 하니시나)과 가이즈 성을 포함한 20만 석 영지를 받았다.[7] 나가요시의 이전 영지였던 가네야마는 동생 나리토시(란마루)에게 주어졌다.

덴쇼 10년(1582년) 4월, 나가요시는 가이즈 성에 입성하여 영지 통치를 시작했으나, 시나노 국의 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특히 그의 영지는 우에스기 씨의 본거지인 에치고 국과 접해 있어, 우에스기 가문과 결탁한 구 다케다 씨 가신들의 저항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4월 5일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손잡은 구 다케다 가신 이모카와 지카마사가 지사무라이 등 8,000명을 이끌고 봉기했다. 이들은 폐성이었던 오쿠라 성을 수리하여 거점으로 삼고, 이나바 사다미치가 지키는 이이야마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나가요시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봉기 세력을 격파하고[7] 불과 이틀 만에 진압했다. 또한 시마즈 타다나오 등 다른 반항 세력도 영지에서 추방하며 지배 기반을 다졌다.

영지 통치의 어려움을 절감한 나가요시는 강경책을 도입했다. 시나노의 국인(国人, 토착 유력자)들에게 처자식을 가이즈 성에 보내 살게 하는 인질 정책을 의무화했으며, 봉기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되는 인근 마을 주민 일부도 강제로 가이즈 성 아래로 이주시켰다. 또한 영내에 금지 조항들을 공포하고, 시나노 국인들과의 회담이나 영지 소유권 문제 등을 직접 처리하며 통치 체제 확립에 힘썼다.[8]

같은 해 5월 23일, 나가요시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공격을 받고 있던 엣추 국의 우오즈 성을 구원하려던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견제하기 위해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에치고 국으로 출병했다. 에치고 국경 부근의 세키가와구치(関川口)를 돌파하고 이모카와 지카마사 등이 지키던 타키리 성을 함락시키는 등 우에스기 영내 깊숙이 침공했다. 6월에는 우에스기 가문의 본거지인 가스가야마 성에서 가까운 니혼기(상월시)까지 진격하여 조조 가게하루를 격파하고[9] 그곳에 진을 쳤다. 당시 가스가야마 성의 병력 대부분이 우오즈 성 구원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나가요시의 압박은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결국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우오즈 성 구원을 포기하고 가스가야마 성 방어를 위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고, 지원을 받지 못한 우오즈 성은 시바타 군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6월 2일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적지 깊숙이 진격해 있던 나가요시는 순식간에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6월 8일, 니혼기의 진을 철수하며 에치고 국에서 퇴각하기 시작했고, 군의를 열어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사망 소식은 시나노의 국인들에게도 전해졌고, 나가요시 휘하에 있던 시나노 출신 무사들은 데우라 모리키요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나가요시를 배신하고 모리 군을 공격하기 위한 일규(잇키,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나가요시는 먼저 가이즈 성에 남아 있던 인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뒤, 인질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가신 오쓰카 단고노카미가 봉기 세력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나가요시는 전투를 벌여 이들을 격파했다. 마쓰모토(松本)에 도착한 나가요시는 데리고 온 인질들을 모두 처형하고 기소 계곡 방면으로 철수했다. 유일하게 철수에 협력한 데우라 모리키요에게 나가요시는 깊은 감사를 표하며 자신의 와키자시(脇差, 짧은 칼)를 하사했다.

철수 도중, 나가요시는 기소후쿠시마 성 아래에서 장사를 하던 가네야마 출신 상인으로부터 성주 기소 요시마사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밀고를 받았다. 나가요시는 일부러 기소후쿠시마 성을 우회하는 대신, 먼저 도착 예정일을 알리는 서신을 요시마사에게 보낸 뒤 실제로는 예정일보다 하루 빠른 심야에 파성추로 성문을 부수고 기습하는 계책을 썼다. 성 안으로 난입한 나가요시의 가신들은 요시마사의 아들 이와마쓰마루(훗날의 기소 요시토시)의 신병을 확보하여 암살 음모를 봉쇄했다.[10] 다음 날 모리 군은 기소후쿠시마 성을 떠났지만, 나가요시는 이와마쓰마루를 인질로 삼아 무사히 귀환로를 확보했다. 히가시미노(東美濃) 지역에 들어선 후 묘목원산씨의 도야마 도모타다 등이 다시 암살을 시도했지만, 기소 가문 측에서 손대지 말 것을 간청하여 무산되었다. 마침내 모리 군은 옛 영지인 가네야마에 무사히 도착했고, 나가요시는 안전지대에 도달했다고 판단하여 대정숙에서 이와마쓰마루를 풀어주었다.

2. 3. 혼노지의 변 이후

덴쇼 10년(1582년) 음력 6월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죽자, 나가요시가 새로 얻은 시나노 영지는 정세가 불안정해져 통치가 어려워졌다. 이에 나가요시는 6월 24일 옛 영지인 미노의 가네야마 산성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에는 오다 노부오, 노부타카, 산포시에게 문안 인사를 했다.[10]

미노로 돌아온 나가요시는 가신들과 합류하여 옛 영토 회복에 나섰으나, 상황은 순탄치 않았다. 옛 가신이었던 히다 타다마사와 구구리 요리토키 등이 이탈했고, 고자토 미쓰아키라, 쓰마키 요리타다, 도야마 도모타다, 사이토 도시타카 등 주변 세력들도 나가요시를 배척하려 해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나가요시는 이들이 연합하기 전에 각개 격파하기로 결정하고, 7월 2일 새벽 히다 타다마사의 요네다 성을 공격했다. 병을 앓던 타다마사는 그날 밤 가지타 성의 사이토 도시타카에게 의탁하여 도주했다. 나가요시는 7월 3일 우시가하나 요새 전투를 거쳐 도도 성 터로 진입해 가지타 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다(가지타·가네야마 합전). 같은 해 히다 타다마사가 병사하고 후계자도 정해지지 않자 히다 가신들은 흩어졌고, 일부는 모리 가문에 귀순했다.[10] 또한 나가요시는 시나노에서 귀환했음에도 인사를 오지 않고 히다 타다마사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옛 가신인 오모리 성의 오쿠무라 모토히로와 가미에도 성의 하세가와 고로에몬을 공격했다. 오쿠무라 모토히로는 성을 버리고 도주했고, 하세가와 고로에몬은 자결했다.[10]

같은 달, 나가요시는 이마 성, 시모아소 성, 노하라 성, 미타케 성을 차례로 공략했다. 네모토 성의 와카오 모토마사, 토키 다카야마 성의 히라이 미쓰무라, 쓰마키 성의 쓰마키 요리타다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10] 모리 가문은 도노 지역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이후 고다 손에몬을 대장으로 삼아 도야마 도모타다의 본거지인 나에기 성 공략에 나섰으나, 도중에 도야마 군의 기습으로 손에몬이 전사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 실패 후 나가요시는 일단 구구리 요리토키와 화목하고, 도야마 도모타다와는 대치를 이어갔다. 외교적으로는 히데요시에게 접근하여 도노 지역 여러 세력과의 중재 역할을 맡았고,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 연명의 서장을 받아 반항 세력을 토벌할 명분을 얻었다.[11]

덴쇼 11년(1583년) 정월, 나가요시는 연회를 열어 구구리 요리토키를 가네야마 성으로 유인한 뒤 가키야 마사노리를 시켜 살해하고, 같은 날 밤 구구리 성을 함락시켰다. 시즈가타케 전투 즈음에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연계한 오다 노부타카의 가신 엔도 요시타카와 엔도 다네모토가 스바라 성과 호토 성을 공략하자, 사토 히데카타와 협력하여 엔도 가문의 영지를 침공했다. 다치바나 산성에 고립된 엔도 군을 공격하여 일부 장수를 죽였으나 성 함락에는 실패하고 병량 공세로 전환했다. 비축 물자가 부족했던 엔도 군은 오다 노부타카의 자결 소식을 듣고 전의를 상실, 중신 두 명을 인질로 보내고 항복했다. 나가요시는 기오 촌에서 엔도 요시타카, 다네모토와 화친하고 안장 얹은 말을 선물하며 항복을 받아들였다(다치바나 산 전투).

그 후 군대를 재정비하여 1583년 5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두 번째 나에기 성 침공을 개시했다. 5월 20일 성을 함락시키자 도야마 도모타다는 성을 탈출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망명했고, 성에 남은 병사들은 모두 전사했다. 아케치 성의 도야마 도시카게, 도야마 가즈유키와 오다 노부타카 측이었던 고자토 성주 고자토 미쓰아키라 역시 미노를 떠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의탁했다. 혼노지의 변 때 성주 단 타다마사가 사망한 이와무라 성도 접수했으며(사료나 군기물 모두에 기재가 없어 자세한 방법은 불명하며, 이와무라 부근 전투 기록도 없다), 오다 노부타카의 중신이었던 사이토 도시타카가 가지타 성을 포기하자 가지타중과 함께 성을 접수했다. 이로써 나가요시는 미노로 돌아온 지 약 11개월 만에 미노 내 저항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도노 전역과 주고쿠 일부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대했다. 통일 후에는 관리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가지타 성 등 여러 성을 폐성시켰다.

이 무렵부터 나가요시는 서신 등에서 '''무사시노카미'''(武蔵守)라는 관직명을 자칭하기 시작했다(수령명 '무사시노카미'는 노부나가에게서 받았다는 설도 있으나, 노부나가 생존 시 '모리 무사시노카미' 명의의 문서는 존재하지 않고 '모리 쇼조'로 기록되어 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으나 여러 전투에서 패배를 겪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장인인 이케다 쓰네오키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미카와를 기습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의 역습을 받아 미간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향년 27세였다. 그의 뒤는 동생 다다마사가 이었다.

2. 4.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죽음

덴쇼 12년(1584년), 하시바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오 사이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져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장인인 이케다 쓰네오키와 함께 히데요시 편에 가담했다. 출진에 앞서 가네야마에서 남쪽으로 가는 배의 통행을 막아 오와리로의 물류를 차단하고, 세키 나리마사와 엔도 요시타카에게 참전을 요청했다.

세키·엔도 군과 합류한 나가요시는 오와리국으로 침공했지만, 이미 이케다 군이 이누야마 성을 공략한 상태였다. 나가요시는 공을 세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마키 산을 점령하고자 군대를 움직였다. 3월 16일 저녁에 출진하여 밤에는 고마키 산성을 눈앞에 둔 하구로(이누야마시)에 진을 쳤다. 그러나 고마키 산은 이미 전날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에게 점령된 상태였고, 나가요시의 움직임을 닌자를 통해 파악한 이에야스는 즉시 사카이 타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오스카 야스타카 등 5,000명의 병력을 하구로로 보냈다. 17일 이른 아침, 도쿠가와 군은 하구로의 나가요시 군을 기습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하구로 전투).

기습을 당한 초반에는 모리 군도 혼란에 빠졌지만, 나가요시는 전열을 가다듬어 전황을 유지했다. 그러나 사카이 타다쓰구가 이끄는 부대가 후방으로 우회하여 퇴로를 차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나가요시는 일부 병력을 뒤로 돌려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 병력이 이를 패주로 오인하여 혼란이 발생했고, 이 틈을 타 도쿠가와 군이 맹공을 가하면서 모리 군은 무너졌다. 대열에서 이탈한 병사들은 도쿠가와 군에게 차례로 격파당했다. 더 이상 전황 유지가 불가능해진 나가요시는 지휘 가능한 병력만 이끌고 북쪽 포위망을 뚫어 간신히 철수했지만, 퇴각 과정에서 노로 무네나가 부자 등 300여 명의 병사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3월 18일, 도쿠가와 가신 니시오 요시쓰구아베 마사카쓰는 도야마 사도노카미에게 보낸 서신에서 하구로 전투에서의 승리와 나가요시의 처참한 패배를 알렸다. 이 소식은 동미노 지역에 영향을 미쳐, 구시하라 도야마 씨 등이 3월 23일 이전에 아케치 성 공격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옛 영토 회복을 노리던 아케치 도야마 도시카게 역시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동미노로 향해 전투에 참여했다. 동미노에서는 3월부터 10월까지 모리 측의 성들이 도야마 측에게 공격받으며 점차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이는 나가요시가 하구로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오와리에 주둔하고 있던 나가요시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지역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나가요시는 오와리에서의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고자 했을 것이며, 이러한 초조함이 나가쿠테 전투 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12]

모리 나가요시의 전사지로 알려진 무사시즈카(아이치현 나가쿠테시 고전장)


이후 교착 상태에 빠진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시바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하는 미카와국 기습 부대에 제2진 총대장으로 참가했다. 4월 7일 밤, 모리 나가요시 군에 잠입해 있던 닌자 핫토리 헤이하치가 이 작전 정보를 이에야스에게 알렸다.[13] 이 전투에 임하며 나가요시는 갑옷 위에 하얀 진바오리를 걸쳐 입고 불퇴전의 각오를 보였다. 부대는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오카자키 성 공략을 목표로 진군하며, 도중에 교란을 위해 별동대를 보내 잇시키 성과 나가쿠테 성에 불을 질렀다. 이후 남하하여 이와사키 성 전투에서는 이케다 군에 가세하여 성주 니와 우지시게를 격파하고, 수비가 허술한 북서쪽에서 성 안으로 난입하여 성을 지키던 가토 가게쓰네마저 물리쳤다.

그러나 기습 부대를 저지하기 위해 이에야스 본대도 움직였고, 이미 총대장 히데쓰구는 도쿠가와 군 별동대에 의해 패주한 상태였다. 히데쓰구를 공격했던 별동대는 제3진의 호리 히데마사 등이 격파했지만, 그 사이에 이에야스 본대가 제2진(나가요시)과 제3진(호리 히데마사) 사이에 포진하면서 이케다 군과 모리 군은 선행 부대로 고립되었다. 더 이상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된 나가요시는 이케다 군과 합류하여 도쿠가와 군과의 결전에 임했다. 이이 나오마사의 군대와 격돌하여 분전했지만, 미즈노 가쓰나리의 가신 미즈노 타로사쿠 기요히사가 이끄는 조총 부대의 병사 스기야마 손로쿠가 쏜 총탄에 미간을 맞고 즉사했다. 향년 27세였다. 전사지로 전해지는 곳(아이치현 나가쿠테시)에는 그의 무덤인 '무사시즈카(武蔵塚)'가 세워져 있다.[14][15]

나가요시의 시신을 수습하여 철수하려던 모리 군 병사들을 오쿠보 타다요 휘하의 혼다 하치조가 추격하여 흩어버렸다. 하지만 당시 도쿠가와 군에는 급박한 상황 때문에 "적장의 목을 벨 필요는 없다"는 지령이 내려져 있었고, 혼다 하치조는 눈에 띄게 돌출했던 나가요시를 대장의 목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코만 베고 와키자시만 빼앗아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다른 무사가 시신에 달려들어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았는데, 이 무사는 도쿠가와 군이 아니라 모리 가문의 다나카 모라는 병사였다는 설이 있다.[16] 이 때문에 나가요시의 목은 도쿠가와 군에게 넘어가지 않고 가네야마 성으로 옮겨졌다.

전투 후, 나가요시의 유언장[17]이 가가미 모토마사, 하야시 미치야스, 하야시 타메타다 등 세 명의 가로에 의해 히데요시에게 전달되었다. 유언에는 아끼던 유명한 다기(名器)를 히데요시에게 헌납한다는 내용 등이 있었으나, "센치요(후의 모리 타다마사)는 히데요시 곁에서 봉사시켜야 한다"거나 "가네야마 성은 믿을 만한 무장에게 맡기라"는 등 히데요시가 받아들이기 곤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협력한 무장의 영지를 몰수할 수는 없었기에, 유언의 해당 부분은 따르지 않고 센치요를 후계자로 인정하며 모리 가문이 가네야마 영지를 유지하도록 했다.

3. 가계


  • 아버지: 모리 요시나리 (1523년 ~ 1570년)
  • 어머니: 묘코니 (? ~ 1596년)
  • 형제:
  • * 모리 요시타카 (1552년 ~ 1570년)
  • * 모리 란마루 (1565년 ~ 1582년)
  • * 모리 보마루 (1566년 ~ 1582년)
  • * 모리 리키마루 (1567년 ~ 1582년)
  • * 모리 다다마사 (1570년 ~ 1634년)
  • 부인: 이케다 센

4. 인물 및 일화

아버지 모리 요시나리와 마찬가지로 창술에 뛰어나, 그 무용으로 인해 "귀무장"이라고 칭송받았다. 그러나 알려진 용맹함과는 달리 작은 체구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아코 오이시 신사에 전해지는 나가요시의 갑옷 크기가 매우 작은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가네야마 산성의 돌계단 100단을 단숨에 뛰어오를 정도의 명마를 소유했다고 한다.

전투 중 여러 차례 명령 위반이나 군율 위반을 저질렀고, 이에 대한 문서[18]도 일부 남아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그에게 구두나 서면으로 주의를 주는 정도에 그쳤으며, 칩거와 같은 무거운 처벌은 한 번도 내리지 않아 노부나가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명필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장에도 항상 과 종이를 가지고 다니며, 보고할 일이 생기면 직접 붓을 들어 작성했다.[19] 다도에도 조예가 깊어 쓰다 소큐가 주최하는 다회에 초대받기도 했다.[20] 명물 수집에도 열심이었는데, 특히 동산어물의 명기 '사와히메의 다호'는 히데요시에게 금 2매를 빌려서까지 손에 넣었을 정도였다. 그는 아내 이케다 씨에게 보낸 글에서 후사를 부탁하며 이 다호와 다이텐모쿠를 히데요시에게 헌상하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무사시노카미(武蔵守)라는 관직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관저를 마련했을 무렵, 오미의 세타에 관소를 설치하고 여러 다이묘들의 이름을 적어 통행하게 했다. 나가요시가 관소에 도착하자 관리가 말에서 내려 가문을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나가요시는 급하다며 말에서 내리지 않고 이름을 밝힌 뒤 통과하려 했다. 이를 막는 관리들을 "노부나가 공 앞이라면 몰라도, 이 쇼조(勝蔵, 나가요시의 아명)에게 하마를 강요하다니 무슨 짓이냐"라며 베어 버리고, 계속 막으면 마을을 불태우겠다고 외치자 문이 열렸다. 나가요시가 이 일을 노부나가에게 보고하며 처분을 요청하자, 노부나가는 웃으며 옛날 고조 다리에서 사람을 죽인 무사시보 벤케이가 있었는데 나가요시 또한 세타 다리에서 사람을 죽였으니 앞으로는 무사시노카미로 개명하라고 말했다고 한다.[21]

다카토 성 공격 당시 격전으로 인해 나가요시의 갑옷 하반신은 적병들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는데, 이를 본 오다 노부타다는 무심코 부상을 입었는지 물었다고 한다.[19] 또한 요네다 성에서 가지타 성으로 히다 겐바(肥田玄蕃)가 퇴각한 것에 대해, 나가요시는 "가모 산(加茂山, 요네다 성)은 지리적으로 불리하다. 가지타는 유리한 곳이다. 가지타에 병력을 모아 나의 공격에 대비하려는 것으로 보아, 꽤 훌륭한 장수이다"라고 평가했다고 전해진다.[10]

4. 1. 유언

별동대를 이끌고 미카와로 기습 공격을 떠나기 전, 가신 비토 도모노부에게 "내 딸은 의사에게 시집보내라. 결코 무사 가문에는 보내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가요시가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철수하려던 모리 군 병사들을 오쿠보 타다요 휘하의 혼다 하치조가 추격하여 흩어뜨렸다. 당시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도쿠가와 군에는 "목을 벨 필요는 없다"는 지령이 내려져 있었다. 하치조는 눈에 띄게 돌출되어 있던 나가요시를 대장의 목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코를 베고, 허리에 찬 칼(와키자시)만 빼앗아 그 자리를 떠났다. 이후 다른 무사가 그 시신에 달려들어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았으며, 나가요시가 입고 있던 흰 옷을 벗겨 목을 감싼 뒤 창 끝에 매달아 말을 타고 자신의 무공을 큰 소리로 자랑하며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무사는 도쿠가와 군 소속이 아니라 모리 가문의 다나카 모라는 인물이었다는 설도 있다.[16] 이러한 설에 따르면, 나가요시의 목은 도쿠가와 군에게 넘어가지 않고 가네야마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유언장[17]이 가가미 모토마사, 하야시 미치야스, 하야시 타메타다 등 세 명의 가로에 의해 히데요시에게 전달되었다. 유언장에는 아끼던 명기를 히데요시에게 바친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또한 "아들 센치요(모리 타다마사)는 히데요시 곁에서 섬기도록 하라"거나 "가네야마 성은 믿을 만한 무장에게 맡기라"는 등 히데요시가 결정하기 곤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협력한 나가요시 가문의 영지를 몰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유언의 이 부분은 따르지 않고 센치요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모리 가문이 가네야마 성을 계속 다스리도록 하였다.

5. 주요 가신


  • 가가미 모토마사
  • 하야시 타메타다
  • 하야시 미치야스
  • 오쓰카 단고노카미 (지게몬)
  • 무토 카네토모
  • 카스가 마사모토
  • 야시로 마사쿠니
  • 데우라 모리키요
  • 무로가 미츠마사
  • 카키야 마사노리
  • 야스다 구니쓰구
  • 이도 우에몬
  • 쓰마키 요리타다 (쓰마키 성 성주)
  • 가와지리 히데나가
  • 와카오 진쿠로 모토요시 (네모토 성 성주)
  • 쓰보우치 도시사다

6. 관련 작품


  • '''소설'''
  • * 가와다 타다시 『전국 학의 군단: 오니 무사, 모리 무사노카미 나가요시 열전』 (향토출판사, 2002년)
  • * 타니구치 켄고 『모리 나가요시』 - 노부나가도 눈여겨본 젊은 맹장 "오니 무사" (PHP 연구소, 2006년)
  • * 스즈키 키이치로 『전국의 오니 모리 무사』 (출판예술사, 2007년)
  • * 협죽도 『전국 코마치 고생담』 (어스・스타 엔터테인먼트, 2013년 - )

  • '''만화'''
  • * 『전국 코마치 고생담』(협죽도・히라사와 시모토 원작, 사와다 하지메 작화, 어스・스타 엔터테인먼트, 2016년 - )

참조

[1] 서적 Hideyoshi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 Asia Center
[2] 서적 Samurai Commanders (2): 1577–1638 https://books.google[...] Bloomsbury
[3] 서적 Toyotomi Hideyoshi https://books.google[...] Bloomsbury
[4] 서적 Giving Up the Gun: Japan's Reversion to the Sword, 1543-1879 https://books.google[...] David R. Godine
[5] 서적 森家系譜
[6] 서적 兼山町史など。
[7] 서적 信長公記
[8] 서적 史料綜覧
[9] 서적 北越軍記
[10] 서적 金山記全集大成
[11] 문서 遠山佐渡守、遠山半左衛門尉宛の12月21日付け羽柴秀吉他連署状写 1582
[12] 서적 小牧・長久手合戦 秀吉と家康、天下分け目の真相 (角川新書)
[13] 서적 小牧・長久手合戦 秀吉と家康、天下分け目の真相 (角川新書)
[14] 뉴스 古戦場ウォークマップ https://www.city.nag[...] 2018-05-10
[15] 웹사이트 子育て・市民活動施設、文化財 https://www.city.nag[...] 長久手市 2021-01-19
[16] 서적 長久手合戦記
[17] 문서 名古屋市博物館蔵
[18] 문서 織田信長黒印状 1582-02-23
[19] 서적 林家覚書
[20] 문서 宗及自會記
[21] 서적 兼山町史 岐阜県可児郡兼山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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